
상식은 법의 원료이자 견제 대상이다. 법·관습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심리학·뇌과학·사회과학·철학으로 상식이 생기고 바뀌는 과정을 팩트로 해설한다.
프롤로그 —
“상식적으로”의 힘과 위험
세이노의가르침이나, 마흔에읽는쇼펜하우어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분명하다.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가지고 있는
상식의 애매모호함을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상식은 보통 법보다 아래에 놓인다. 강제성이 없는 사회통념에 가깝다.
그러나 갈등이 깊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늘 상식을 앞세운다.
상식은 법처럼 조문으로 쓰여 있지 않지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기본값처럼 작동한다.
많은 사람은 상식을 법보다 아래의
느슨한 관습쯤으로 취급하거나, 반대로 “법 따위 없어도 상식이면 된다”고 믿는다.
실제로는 둘의 관계가 더 복잡하다.
공동체의 다수가 “그게 옳다”라고 느끼는 직관과 관행이
오랜 시간 축적되면, 판례와 입법 과정에 녹아들어 법의 재료가 된다.
교차로에서 깜빡이를 켜는 것, 줄을 서는 방식,
공동 공간을 깨끗이 쓰는 규칙 같은 것들은 처음엔 상식이었고, 필요하면 조문으로 전환되었다.
동시에 법은 다수의 상식이 소수의 권리를 누르지 못하도록 상식을 교정한다.
과거엔 상식처럼 여겨졌던 차별과 배제가
법의 판단을 통해 수정되고,
그 판결이 다시 사람들의 ‘당연함’의 범위를 바꾼다.
그러니 상식과 법은 위계라기보다 순환 관계에 가깝다.
상식이 법의 원료이자 사용설명서가 되고, 법은 상식을 점검하고 재조정한다.

CHAPTER 1.
법·관습 관점: 상식은 법의 원료이자 사용설명서다
심리학적으로 상식은 ‘빠른 생각’에 가깝다.
우리는 매 순간 완전한 정보를
모으고 계산하지 않는다.
손에 든 단서로 대충 그럴듯한
결론을 내리는 휴리스틱(발견적 방법)을 쓴다.
대표성, 가용성 같은 규칙이
“그건 상식이지”라는 감각을 만들어 준다.
이 장치 덕분에 우리는 적은 비용으로
충분히 괜찮은 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 있지만,
동시에 편향도 생긴다.
특정 집단을 떠올릴 때 자동으로 붙는 이미지나,
최근 본 뉴스에 과도한 가중치를 두는 경향이 그것이다.
도덕 판단도 비슷하다.
먼저 직관이 ‘좋다/나쁘다’의 감정을 켜고,
그 뒤에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화나는” 사안이
곧바로 옳음을 보장하지 않는다.
상식은 첫 결론일 뿐이고, 근거와 반례를 통해 다듬어져야 한다.
즉, 우리가 말하는 "그건 상식이잖아"는
절대 옳음의 결과가 아니라
다듬어 지지 않은 견해인 것이다.
단, 이런 다듬어 지지 않은 견해가 쌓여 사회적 관심이 쌓이면 법제화 될 수 있다.

CHAPTER 2.
심리학·행동과학 관점: 상식은 ‘빠른 직관’이 만든 그럴듯함이다
뇌과학의 언어로 옮기면 상식은
예측을 위한 압축 규칙이다.
뇌는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의 내부 모형을 만들고, 새 정보가 들어올 때
그 모형과의 차이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매번 처음처럼 계산하는 대신,
익숙한 맥락에선 “보통 이럴 땐 이렇게 한다”는
저비용 규칙이 자동으로 호출된다.
해마는 상황의 맥락을 복원하고, 전전두엽은
어떤 규칙을 꺼내고 무엇을 억제할지 결정한다.
이때 예측오차가 반복되면 규칙이 수정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예절, 업무에서의 회신 속도,
마스크 착용 같은 것들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상식’으로 바뀌고 다시 느슨해지는 과정을 떠올리면 된다.
새로운 기술, 인구 구성의 변화, 이민과 같은 환경 변화는 예측오차를 늘려 상식을 업데이트하게 만든다.

CHAPTER 3.
뇌과학 관점: 상식은 ‘예측 엔진’의 압축 규칙이다
사회과학은 상식을 개인의 머릿속이 아니라
관계의 망 속에서 본다.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부드러운 강제력을 가진다.
신호가 없는 교차로에서 한쪽이 먼저 양보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을 먼저 보내는 건
법보다 상식이 빨리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유된 기대는
협조의 비용을 줄여 균형을 안정화한다.
동시에 상식은 권력이 자신을 숨기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 전제—특정 성별의 역할, 직업에 대한 암묵적 구분, 세대 간 의무—가 그 예다.
플랫폼의 버튼 배치, 알고리즘의 가시성 같은 설계도
새로운 ‘온라인 상식’을 만든다.
설정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당연히’라는 이름으로 따르는 경로가 달라진다.

CHAPTER 4.
사회과학·철학 관점: 상식의 권위와 한계
철학은 상식의 권위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모든 것을 의심하면 삶은 굴러가지 않는다.
서로가 이해 가능하다고 믿는 기본 감각,
즉 공통감각이 있어야 소통과 판단이 가능하다.
우리는 언어와 관습, 반복된 실천 속에서 규칙을 익히고, 그 규칙에 의지해 세상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 기본값은 보편이 아니라 국소적인 합의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 소수자의 권리 주장,
다른 문화와의 접촉은 기존의 상식을 흔들고,
때로는 완전히 갈아엎는다.
그 변화의 과정에서 논증과 절차
—법, 토론, 증거—가 상식을 재분류한다.
결국 “상식적으로”라는 말은 시작일 수는 있어도 종착지는 아니다.

에필로그 —
‘상식적으로’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세 가지
실전으로 좁혀 보자. 상식은 빠르고 싸고 편리하다.
매일의 결정 대부분을 감당하는 실용적 도구다.
다만 그것이 편향과 권력을 숨기는 방패가 되지 않도록, 세 가지 습관을 붙이면 좋다.
첫째, 상식으로 결론 내린 뒤
근거를 한 줄, 반례를 한 줄 적어 본다.
둘째, 이해관계자가 다르면 맥락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역지사지 시나리오를 돌려 본다.
셋째, 소수자·약자를 다루는 문제라면
상식 대신 법과 절차를 앞으로 세운다.
이 세 가지를 반복하면 상식은
무기가 아니라 신뢰의 약속이 된다.
상식은 법의 기반이면서도 법의 견제를 받는,
개인의 직관이면서도 사회의 리듬에 맞춰 조율되는, 살아 있는 규칙이다.
중요한 건 그것을 ‘당연함’으로 쓰는 태도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당연함’으로 바꾸려는 태도다.
오늘 우리의 상식이 내일도 타당하길 원한다면,
질문하고, 반례를 찾고, 변화에 맞춰 업데이트하라.
그러면 상식은 편리함을 넘어 공정함을 떠받치는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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