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는 왕조와 제국, 석유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나라들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라오스의 란쌍, 석유로 번성했던 베네수엘라,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 이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네 나라를 전쟁, 빈곤, 제재, 불안정의 이미지로 더 많이 떠올린다. 이 글에서는 네 나라의 공통 패턴을 뽑아 보고, 과학·철학·심리학 이론으로 그 이유를 풀어본다.
CHAPTER 1. 황금기의 역설 –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지리의 함정
“유리한 환경이 시간이 지나면 가장 큰 약점이 되기도 한다”
네 나라의 첫 번째 공통점은 과거의 “황금기”다.
캄보디아는 앙코르 왕조가 거대한 사원과
수리 시설을 갖춘 도시 문명을 만들었고,
라오스는 란쌍 왕국 시절 메콩 강을 따라 번성했다.
이란은 말할 것도 없이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이었고,
베네수엘라는 20세기 중반 “석유 부국” 상징 같은 나라였다.
한때 이들은 주변 국가가 부러워하던 중심이었다.
환경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지리적 행운”이 문명의 차이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비옥한 땅, 교역에 유리한 위치, 풍부한 자원은
빠른 성장을 돕는다.
네 나라는 모두 이런 의미의 ‘좋은 땅’을 갖고 있었다.
강과 바다, 석유와 광물, 고대 교역로의 결절점들이
여기에 겹쳐 있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동시에, 그 지리적 행운이
나중에는 “침략과 착취의 타깃”이 된다고도 말한다.
자원이 풍부하고 전략적 위치에 있을수록
외세의 개입과 전쟁이 몰려들기 쉽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냉전기의 전쟁터가 되었고,
베네수엘라는 석유 가격과 국제 정치에 휘둘리는 경제 구조가 굳어졌다.
이란 역시 석유와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제국주의, 쿠데타, 제재의 교차로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좋은 환경”은 내부 엘리트에게도 유혹이 된다.
땀 흘려 산업을 키우지 않아도, 자원만 팔아도 어느 정도의 부는 유지된다.
그러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서로를 지키는 구조가 형성되기 쉽다.
겉으로는 과거의 영광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이미 “환경 덕분에 버티는
취약한 시스템”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CHAPTER 2. 제도의 함정 – 다론 아제모글루와 ‘착취 국가’의 탄생
“부를 키우는 제도냐, 빨아먹는 제도냐”
경제학자 다론 아제모글루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를 나눠 설명한다.
포용적 제도는 더 많은 시민이
경제·정치 활동에 참여하게 만들고,
착취적 제도는 소수 엘리트가 자원과 권력을 빼앗아 가는 구조다.
낙후의 핵심은 가난이 아니라, 이 제도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고정되었느냐에 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식민지, 냉전, 내전을 거치며
권력이 계속 “총을 든 집단” 손에 쥐어졌다.
정권이 바뀌어도 권력 장악 방식은 비슷했다.
총과 당, 군과 정보기관이 제도의 중심에 서고,
시민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구조 안에 남았다.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둘러싼 정권과 기업,
군부의 동맹이 굳어졌고, 이란은 혁명 이후
종교 엘리트와 혁명수비대가 경제와 정치를
동시에 틀어쥐는 체계로 재편되었다.
아제모글루 관점에서 보면, 네 나라의 공통점은
“부를 나누기보다, 통제하고 배타적으로
소유하려는 제도”가 굳어진 점이다.
선거가 있든 없든, 권력 주변에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의 삶은 너무 다르다.
이런 제도에서는 교육과 창업, 혁신이
‘위험한 행동’이 되기 쉽다.
성공이 정치 권력을 자극하면,
언젠가 빼앗기거나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영광이 있던 나라일수록,
제도가 착취적으로 변하면 더 가파르게 무너진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충격이 더 큰 것처럼,
자원과 상징 자본이 풍부한 국가일수록
부패와 독점의 속도도 빠르다.
결국 “낙후”는 운명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제도의 선택 결과다.
CHAPTER 3. 폭격과 학살, 제재가 남긴 상흔 – 바셀 반 데어 콜크의 집단 트라우마
“국가도 몸을 가진 존재처럼 상처를 기억한다”
네 나라를 떠올리면, 전쟁·학살·제재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주 시기에 학살과 강제노동으로
인구의 큰 부분을 잃었고,
라오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폭격당한 나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전기의 폭탄을 맞았다.
베네수엘라는 붕괴하는 일상 속 폭력과 범죄,
이란은 혁명·전쟁·장기 제재와 함께 살아왔다.
트라우마 연구자 바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외상 경험이 뇌와 몸에
어떻게 각인되는지 설명한다.
위험 상황이 반복되면 뇌는 항상
“다시 공격이 올지 모른다”는 전제 아래 움직이게 된다.
편도체는 과도하게 예민해지고,
전전두엽의 이성적 판단 기능은 쉽게 멈춘다.
인간은 지속적인 위협 속에서, 장기 계획보다 “당장 살아남는 법”에 집중하게 된다.
국가 차원의 트라우마도 비슷하다.
학살과 폭격, 제재를 겪은 사회는
“언제 또 뒤집힐지 모른다”는 집단 감각을 갖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안정적인 제도보다
강하고 단순한 지도자, 혹은 더 큰 외부 보호자를 찾게 된다.
단기 생존을 위해 장기 민주주의와 법치의 가치를
양보해 버리는 것이다.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정치적 침묵, 베네수엘라와
이란에서 반복되는 시위와 탄압은
이런 집단 트라우마의 다른 얼굴이다.
계속되는 위기의 기억은 사회를
“과잉 경계 상태”로 만든다. 그 결과,
경제를 키우는 합리적 토론보다 음모론과
극단적 언어가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하면, 과거의 폭력은 형태를 바꿔 현재의 낙후로 계속 재생산된다.
CHAPTER 4. 미래를 고르는 뇌 – 다니엘 카너먼과 손실회피의 정치
“나빠도 익숙한 체제 vs 좋을지 모르는 변화”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은 인간이
“이익을 얻는 것보다, 손실을 피하는 것에
더 민감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손실회피 성향이다.
우리는 조금 더 나은 미래보다, 지금 가진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 크게 반응한다.
이 성향은 개인의 소비뿐 아니라,
정치와 국가 선택에서도 강하게 작동한다.
캄보디아·라오스·베네수엘라·이란 모두,
변화의 순간마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싸워야 했다.
독재를 끝내고 제도를 바꾸자는 요구는 있었지만,
그 끝이 내전일지, 더 심한 혼란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미 전쟁과 붕괴를 겪은 사람일수록,
익숙하지만 비효율적인 체제를 붙잡으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손실회피가 집단 차원에서 작동하는 순간이다.
이 성향은 권력을 쥔 쪽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기득권은 “지금의 특권을 잃는 것”을
최악의 손실로 인식한다. 그래서 경제 제재나
국제 압박이 강해져도, 내부 개혁보다
통제와 탄압을 먼저 선택한다.
장기적으로는 나라 전체가 가난해지는
길임을 알면서도, 당장의 손실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카너먼의 연구는 동시에 “우리가 이런 심리적 편향을
자각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
네 나라가 과거의 영광에만 매달리지 않고,
지리적 행운을 다시 “공유 자산”으로,
제도를 “나누는 구조”로 바꾸려면
손실회피의 렌즈를 의식적으로 벗어야 한다.
영광과 가난 사이의 거리를 줄이는 일은,
결국 뇌와 제도를 함께 고치는 긴 실험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 실험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선택과도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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