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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 허송세월로 버티는 생로병사의 무게와 뇌과학의 시선

by 마음이랑 2026.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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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산문집 『허송세월』은 늙음과 병, 죽음과 밥벌이, 말과 침묵을 바라보는 노 작가의 기록이다. 이 글은 『허송세월』의 문장들을 따라가며, 허송세월이라는 가벼운 말이 어떻게 우리 뇌와 마음에 실제로는 버티는 힘을 만들어 주는지, 뇌과학과 심리학의 관점에서 함께 풀어본다.

핸드폰에 부고가 배달되듯 도착하는 시대, 김훈은 『허송세월』에서 늙고 아프고 죽어가는 일을 허송세월의 가벼움으로 버텨 보자고 말한다. 허송세월, 멍때리기, 밥과 물건, 말의 절제까지 이 산문이 던지는 질문을 뇌과학과 심리학과 함께 다시 읽어 본다.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 허송세월로 버티는 생로병사의 무게와 뇌과학의 시선

 

 



CHAPTER 1. 김훈 산문집 『허송세월』, 어떤 책인가

김훈의 산문집 『허송세월』은 첫 문장에서부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공기를 곧장 찌른다.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죽음마저 알림창으로 도착하는 일상이 너무나 익숙해진 시대, 그는 자신의 늙어 가는 몸과 주변의 죽음을 바라보며 느리지만 또렷한 문장으로 삶을 더듬어 나간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새를 기다리며’는 심혈관 질환을 겪고 난 뒤의 몸, 입원실, 오줌통, 뼛가루가 될 때까지의 시간을 바라보는 노년의 시선을 담는다. 일산 호수공원에 앉아 새소리를 듣고 햇볕을 쬐며 보내는 나날 속에서 그는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라고 말한다. 허송세월은 게으름의 언어가 아니라, 생로병사의 무게를 겨우 버티기 위해 필요한 가벼움으로 등장한다.

 

2부 ‘글과 밥’에서 김훈은 다시 밥벌이와 언어로 돌아온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오래전부터 말해 온 작가는 이번에도 밥과 밥그릇, 절구와 맷돌 같은 낮은 물건들을 바라보며, 글이 삶과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형용사와 부사를 의심하고,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며, 말이 삶에 닿아 있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문장을 다듬는다.

 

3부 ‘푸르른 날들’에서는 시야가 더 멀리 뻗는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안중근, 방정환, 최인훈, 박경리, 신경림 같은 이름들이 불려나온다. 난세를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화세(譁世)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는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허송세월』은 그렇게 개인의 늙음과 몸의 고통에서 출발해, 밥과 말, 시대와 타인으로 시선을 확장해 가는 산문집이다.

단단한 문장, 단순한 사물, 천천히 늙어 가는 몸. 김훈의 『허송세월』은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무거운 것을 붙들고 바라보되, 그 무게를 허송세월이라는 가벼운 말로 겨우 버텨 내는 법을 보여주는 책에 가깝다.



CHAPTER 2. 늙기와 죽음을 생각하는 뇌 – “생활은 크구나”라는 여섯 글자

『허송세월』 곳곳에는 늙고 병든 몸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심혈관 질환으로 입원해 소변이 오줌통에 고이는 모습을 지켜본 이야기, 장기마다 골병이 들어간 몸, 언젠가 완전히 사그라져 재가 될 몸을 떠올리는 문장들. 그럼에도 그는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고 말한다. 죽음을 끔찍한 공포라기보다, 결국은 뼛가루가 될 가벼움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노년 심리 연구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의 시간 감각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미래가 길게 펼쳐져 있다고 느끼는 젊은 시절에는 경험, 도전, 성취 같은 것에 더 끌리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느끼는 노년에는 지금 이 순간의 정서적 의미,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조용한 만족감 같은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 김훈이 호수공원에서 햇볕을 쬐며 하루를 보내며, “생활은 크구나”라는 여섯 글자를 적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삶이 크다는 말은, 멋있는 업적이 크다는 뜻이 아니다. 몸이 아프고, 숨이 가쁘고, 작은 일상도 힘든 상태에서 “오늘 하루를 버텨낸 것 자체가 크다”는 깨달음에 가깝다. 노년의 뇌는 장기적인 목표보다, 지금 눈앞에서 느껴지는 생활의 실감과 정서적 의미에 더 큰 가중치를 둔다. 그래서 『허송세월』의 문장들은 거창한 결론 대신, “오늘도 호수공원에 나가 햇볕을 쬐다 다시 돌아오는 하루” 같은 장면에서 멈춘다.

 

죽음을 자주 떠올리는 것이 항상 나쁜 일은 아니다.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불필요한 경쟁과 소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관계와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김훈이 재의 가벼움을 생각하며, “이렇게나 가벼운 것으로 돌아갈 삶을, 우리는 얼마나 무겁게 짊어지고 살았던가”를 떠올리는 장면은 죽음을 의식하는 일이 오히려 삶의 우선순위를 정리해 주는 과정이라는 걸 보여준다.

 

『허송세월』에서 김훈은 노인의 체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늙어 가는 뇌가 선택한 새로운 집중의 방향을 보여준다. 힘겨운 몸으로도 매일 글을 쓰고, 매일 호수공원에 나가서 새를 보고, 햇볕을 쬐고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 “생활은 크구나”라는 짧은 문장은, 생로병사의 무게를 온몸으로 겪어낸 뒤에야 겨우 도달하는 한 줄의 결론처럼 읽힌다.



CHAPTER 3. 허송세월과 멍때리기 – 아무것도 안 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

『허송세월』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 중 하나는 이 말일 것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우리는 평소 “허송세월”을 게으름, 낭비 같은 부정적인 말로 쓰지만, 김훈은 오히려 허송세월을 생활의 핵심으로 끌어올린다.

 

뇌과학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을 때도 뇌가 매우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이때 작동하는 회로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부르는데, 과거 경험을 정리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쓰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은 순간”이, 뇌 입장에서는 삶의 데이터를 정리하고 통합하는 중요한 시간인 셈이다.

 

김훈이 말하는 허송세월은 바로 이런 멍때리기와 가깝다. 일을 못 해서 쉬는 시간이 아니라, 일부러 호수공원에 나가 햇볕을 쬐며 새소리를 듣고, 갈대숲의 부스럭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 “새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동네는 복 받은 동네”라는 문장은 자연의 소리가 그의 허송세월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자연 속에서 멍하니 있는 시간은 실제로 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추고 주의력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도 많다. 인공적인 화면과 정보가 쏟아지는 공간에서 벗어나, 나무, 물, 새소리 같은 자극에 노출되면 우리의 긴장 시스템은 서서히 진정되고, 반대로 지친 회로는 회복을 시작한다. 김훈의 허송세월은 단순한 한가함이 아니라, 생리적으로도 뇌와 몸을 재부팅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햇볕 속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네 머리통에서 햇볕 냄새가 난다”고 말해 주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햇볕에 냄새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였던 그는 그 말을 믿었다. 이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햇볕, 엄마의 목소리, 안전감과 안도감이 하나로 묶인 장면이다. 우리 뇌는 이렇게 작은 감각과 말, 몸의 느낌을 함께 저장해 두었다가, 비슷한 햇볕을 다시 쐬는 순간 그 기억을 꺼내 삶을 버틸 힘으로 만든다.

 

그래서 허송세월은 결코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다. 지나온 삶의 조각들이 조용히 서로 이어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조금씩 정리되는 시간이다. 일을 미친 듯이 해왔던 세월보다, 햇볕을 쬐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더 충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 『허송세월』은 이 불편한 진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천히 인정하는 책이다.



CHAPTER 4. 밥과 물건, 글쓰기 – 삶의 질감을 지키는 감각의 과학

2부 ‘글과 밥’에서 김훈은 다시 밥상으로, 주방으로, 박물관의 생활 도구들로 눈을 돌린다. 절구, 맷돌, 항아리, 젓독, 김장독, 밥그릇, 국그릇, 뚝배기, 탕기…. 그는 이 물건들이 지닌 질감을 “필수불가결한 것들이 지니는 단순성과 현실성”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박물관에서 본 똥바가지에 대해서는, 쓰레기가 아니라 “펄펄 살아 있던 활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뇌는 추상적인 개념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물과 감각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손, 입, 혀, 얼굴은 뇌 속 감각 지도에서 아주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밥을 씻고, 불을 올리고, 국자를 저어 밥을 퍼 담는 행위는 몸으로는 사소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뇌 입장에서는 온몸을 쓰는 거대한 자극이다. 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은, 사실은 “몸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과도 겹친다.

 

김훈이 생활 도구들에 이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야 토기의 “어둡고 서늘한” 구멍을 들여다보며 그는 그 안에 담겼을 물과 곡식, 그리고 그것을 만들던 옹기장이의 숨결을 상상한다. 사물을 통해 과거의 몸과 노동을 떠올리는 이 상상력은, 뇌 속에서 물건이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기억과 이야기, 감정이 덧입혀진 “기억의 앵커”로 저장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김훈은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어 글을 부풀리는 순간을 경계한다.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 대신 밥, 그릇, 똥바가지처럼 손에 잡히는 사물의 이름을 호출하려고 한다. 이는 뇌과학적으로 보면, 추상적인 문장보다 구체적인 이미지와 감각이 더 오래 기억에 남고, 더 강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허송세월』에서 밥과 물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늙어 가는 삶의 경계에서 “실감 나는 것”을 붙잡으려는 몸부림처럼도 보인다. 몸이 약해지고,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일상 루틴과 사소한 물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특정 컵, 오래 쓰던 그릇, 손에 익은 수저 같은 것들이 나라는 사람의 역사를 붙잡아 주는 작은 닻이 된다. 김훈의 산문은 그 닻들을 하나씩 어루만지는 글쓰기다.



CHAPTER 5.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 화세(譁世)에서 살아남는 언어의 태도

『허송세월』의 후반부에서 김훈은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에 대해 쓴다.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말은 알아듣기 어렵고, 근거 없고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자로는 화(譁)라고 쓴다고 말한다. 온 세상에 말의 쓰레기들이 물 끓듯 들끓는 세상을 그는 화세(譁世)라고 부른다. 스마트폰만 열면 끝없이 쏟아지는 뉴스, 댓글, 영상, 말들 속에서 이 표현은 지금 우리 시대를 정확히 겨냥한다.

 

정보가 너무 많아지면, 우리의 뇌는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이게 사실인지, 의견인지, 감정인지”를 구분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 구분 작업에는 많은 에너지가 들고, 우리는 쉽게 피로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사실 여부보다는 “내 감정과 맞는지, 내가 이미 믿고 있는 것과 맞는지”만을 기준으로 말을 고르게 된다. 화세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김훈은 형용사와 부사를 경계하면서, 언어의 이 욕망을 조심스럽게 다룬다.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싶어 하는 충동이 언어의식 속에 깔려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글이 잘 써지는 날일수록, 문장의 고삐를 더 세게 쥐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어 글을 들뜨게 만드는 순간, 글 쓰는 자를 제압하는 것은 문장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말이 과장되고 단정적일수록 우리는 더 강한 보상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단호한 어조, 극단적인 표현은 뇌의 보상 회로를 자극하고, “내가 옳다”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이런 언어는 장기적으로는 관계를 파괴하고, 세상을 더 시끄럽게 만든다. 화세는 결국, 우리가 조금 더 자극적인 말에 중독된 결과이기도 하다.

 

『허송세월』에서 김훈이 택한 태도는 적극적인 침묵에 가깝다. 말을 안 하겠다는 침묵이 아니라, 꼭 해야 할 말만, 삶에 닿아 있는 말만 남기고 나머지 기름기를 걷어 내겠다는 태도다. 늙어 갈수록, 말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말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핸드폰에 부고가 배달되듯 도착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비극과 분노의 말을 스크롤하며 지나칠 것이다. 그 와중에 『허송세월』은,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새소리와 햇볕을 허송세월처럼 맞아들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허송세월, 멍때리기, 밥과 물건, 말의 절제. 이 네 가지가 합쳐질 때, 우리는 비로소 화세 속에서도 조금은 덜 상처받고, 조금은 더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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