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은 인생이 10년뿐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일본 소설 『남은 인생 10년』은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젊은 나이에 난치병 진단을 받고, 여명이 10년 남았다는 말을 듣게 된 주인공 ‘마쓰리’. 그녀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누구를 사랑하고, 무엇을 포기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뇌와 마음이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이 글은 줄거리를 요약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책 속 장면을 빌려 시간 인지·감정 조절·관계를 다루는 뇌의 작동 방식을 조심스럽게 함께 살펴보려는 시도입니다.
CHAPTER 1. “10년 남았습니다”라는 말이 삶을 갈라놓을 때
주인공 마쓰리는 평범한 스무 살이 아니라, 병원에서 “여명 10년”이라는 진단을 받은 청년입니다. 병명은 희귀 난치병, 치료법은 없고, 조용히 병이 진행될 거라는 설명뿐입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시간은 두 개의 층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간입니다.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시간입니다. “나는 저렇게 오래 살지 못하겠지”라는 문장이 모든 계획 위에 얇은 막처럼 덮입니다. 질투와 자기 혐오, 공포가 번갈아 올라오고, 친구들의 행복조차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다 마쓰리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결심을 내립니다. “사랑은 하지 않겠다. 깊이 사랑할수록 떠날 때 더 잔인해지니까.” 그것이 남은 시간을 덜 아프게 보내는 방법이라고 믿으면서요. 이 장면은, 우리 뇌가 상실의 가능성을 감지했을 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CHAPTER 2. 남은 시간이 ‘보이는’ 순간, 뇌는 우선순위를 다시 짠다
평소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게 구체적인 시간으로 다가오진 않습니다. 그래서 먼 미래를 향한 계획을 쉽게 미루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밀어 놓기도 하죠.
그런데 마쓰리처럼 “남은 인생 10년”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뇌는 시간을 다르게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심리학에서는 미래 시간 관점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시간이 많다”고 느낄 때는 경험·성취·커리어 같은 장기 목표를 중시하지만, 시간이 짧다고 느끼면 감정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와 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전전두엽입니다. 전전두엽은 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충동을 조절하는 “뇌의 컨트롤 타워”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남은 시간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순간, 전전두엽은 지금까지의 계획을 다시 검토합니다. “정말 이 목표가 중요한가?”, “이 사람과의 시간이 더 소중한가?”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됩니다.
『남은 인생 10년』에서 마쓰리는 결국 “무엇을 더 이룰까”보다 “누구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낼까”를 선택합니다. 병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작은 일상과 소중한 사람들과의 순간을 중심에 두는 쪽으로 뇌의 우선순위를 재정렬합니다. 이것은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힌트를 줍니다. “지금 내 전전두엽은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일로 보고 있을까?”
CHAPTER 3. 사랑을 피하고 싶지만, 결국 사랑이 우리를 버티게 한다
마쓰리는 처음에 사랑을 피하려고 합니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떠날 때 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줄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동창회에서 한 남자를 만나고, 둘 사이에는 피하고 싶으면서도 피할 수 없는 감정이 자라납니다. 이때 그녀의 뇌에서는 두 개의 시스템이 충돌합니다.
하나는 공포와 회피의 회로입니다. 편도체는 위험과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상처받을 수 있는 상황”을 피하게 만듭니다.
사랑에 빠지면 나중에 이별이 너무 아플 거라는 예측이, 미리 불안을 키웁니다.
다른 하나는 애착과 유대의 회로입니다. 누군가와 웃고 울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 옥시토신과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됩니다. 이 물질들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을 만들며, 고통을 버티는 힘을 줍니다.
책 속에서 마쓰리는 끝까지 “완벽한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다만, 사랑을 피한다고 해서 상실의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사랑을 선택했던 순간들 덕분에 마지막 10년이 두려움만 있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와 온기가 섞인 시간이 됩니다. 이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CHAPTER 4. 시한부 인생이 아니어도, 우리는 모두 ‘남은 인생 모드’로 살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는 “남은 인생 10년”이라는 선고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쉽게 미루고, 또 미룹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미루고, 몸이 원하는 휴식을 미루고, 언젠가 하고 싶다는 말을 “언젠가”에 묶어 둡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모든 걸 뒤집을 필요는 없습니다. 뇌과학과 심리학이 알려주는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행동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 오늘 하루를 “언젠가”가 아니라 “남은 10년 안의 하루”라고 생각해 보기
-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 마디 더 따뜻한 말을 건네 보기
- 몸이 보내는 피로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잠깐이라도 쉬어 주기
『남은 인생 10년』은 결국 “슬픈 시한부 로맨스”라기보다, 시간 감각을 다시 세팅해 주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내게도 언젠가 끝이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선택들을 조금 더 정성스럽게 고르도록 조용히 등을 떠미는 책입니다.
우리는 마쓰리처럼 여명이 선고된 상태는 아니지만, 어쩌면 모두가 각자의 ‘남은 인생 모드’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덮고 난 뒤, 휴대폰 화면을 끄고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본다면, 이미 당신의 뇌는 “조금 다른 방식의 오늘”을 준비하기 시작한 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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