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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심리를 푸는 따뜻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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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웃을 피하게 되었을까?

by 꼰대가랬숑 202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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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웃을 피하게 되었을까?

 

 

한국의 전통 공동체 문화인 ‘마실’은 정서적 유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도시화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거치며 우리는 이웃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은 마실의 역사부터 현대인의 사회적 고립까지, 관계 회복의 심리학을 담았다.

 

Chapter 1.
마을은 하나의 집이었다 – 전통 공동체 문화


“김씨네 장독대에 고추장이 넘쳤대.”
“최씨네 손주 돌이라 오늘 잔치 벌인다더라.”
이말 단 한마디에, 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곳을 향해 움직였고, 당연히 마음도 함께 나누었다.

한국의 전통 마을은 단순한 주소지가 아니라, 함께 사는 집의 확장이었다.

함께 사는 공동 주택처럼 살며, 서로 서로 돌봐주었다.

이른 아침, 늦은 저녁, 앞 집, 뒷 집, 아랫마을, 윗마을 할 것 없이 마실을 다녔다.
‘마실’이란 말 자체가 집 안에서 집 밖으로, 집 밖에서 다시 이웃의 집으로 이어지는 따뜻한 순환의 감정선이었다.
문도 열려 있었고, 마음도 열려 있었다.

‘마실’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산책이나 외출이 아니라,
이웃과 자연스럽게 정을 나누는 행위였다.
말을 걸기 위해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고, 연락 없이 찾아가도 불쾌하지 않던 시절.
잔치가 열리면 마을 전체가 함께 모였고,
누군가 생을 다하면 슬픔을 나누고 함께 장례를 치렀으며,
집안일이 많으면 품앗이로 서로 도왔다.

이러한 공동체 문화는 정서적 안전망이었다.
사회복지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이웃은 보험이었고, 정은 연금이었다.
아이들은 마당을 넘나들며 자랐고, 어른들은 대문 앞 평상에서 서로의 인생을 들여다보며 늙어갔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

“건강한 자아는 건강한 공동체에서 자란다”고 말한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 정체성은 '관계의 거울'을 통해 형성된다.
즉,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알고,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안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전의 한국 마을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이 마을의 누구”로 번역되던 시절이었다.
정체성이 고립이 아닌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는 문화.

하지만 이제 그 마을은 사라졌다.
아니, 같은 공간은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

 

 

 

 

Chapter 2.
언제부터 우리는 벨을 누르지 않게 되었나?


“띵동.”
이젠 이 소리가 낯설다.
초인종이 울리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누구지?’ 하고 긴장하게 된다.
예전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문 열어주던 시대가 아니라 경계심이 먼저 자리한다.

‘예고 없는 방문은 실례’라는 현대의 기준이

정착된 결과다.

도시는 그렇게 이웃의 얼굴을 모른 채 살아가는 구조로 발전했다.
우리 아파트 옆집 사람이 누군지조차 모른 채,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회적 거리두기’ 아닌 ‘심리적 거리두기’를하고 있다.

이 변화는 한순간의 사건이 아닌,
사회 구조와 가치 변화, 그리고 기술의 진보가 만든 누적의 결과다.

  1. 핵가족화와 프라이버시의 등장
    산업화 이후, 한국 사회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빠르게 전환했다.
    공간은 좁아졌고, 경계는 뚜렷해졌다.
    공동체보다는 개별 가정의 프라이버시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2. 도시화와 속도 중심 사회
    바쁜 일상 속에서 이웃은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동선이 겹치는 타인이 되었다.
    인사는 ‘의무’가 되었고, 대화는 ‘부담’이 되었다.
    우리는 안부 대신 알림을 받고, 방문 대신 메시지를 보낸다.
  3. 코로나19와 물리적 거리두기
    결정타는 코로나였다.
    전염을 막기 위한 거리두기는 기술적으로는 필요했지만, 정서적으로는 단절을 강화시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인사보다 눈을 피하는 것이 예의가 되었고,
    이웃을 만나도 마스크 너머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심리학자 존 카시오포

“외로움은 인간의 뇌에 물리적 통증과 유사한 자극을 준다”고 밝혔다.

 

그는 사회적 고립이 우울증, 수면장애, 인지저하까지 유발한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관계가 사라진 시대에 정서적 통증을 안고 살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연결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단절은 시스템의 오류이며, 외로움은 본능의 위반이다.

이웃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는 세상,
방문하기보다 배송(?)을 더 많이 만나는 사회.
우리는 편해졌지만, 정서는 말라가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는 벨을 누르지 않게 되었나?

 

 

 

Chapter 3.
다시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용기 - 잃어버린 관계 회복 심리학


초인종을 누르는 게 어색해진 사회.
“이 집엔 누가 살지?”
우리는 이웃이 누구인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그저 내 이웃의 정체나 배경에만 관심이 있다.

당연히 그 이유는 나에게 유해 한지, 무해 한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단절된 존재로 설계되지 않았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

“진짜 연결은 완벽함이 아니라
취약함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녀는 ‘취약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드러낼 때,
비로소 진짜 유대가 생긴다고 강조한다.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이 생각되어지는 요즘이지만

그럴수록,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건 용기 있는 불편함이다.
아주 작은 인사, 한 마디 안부,
혹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이웃에게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짓는 순간
공동체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연결의 회복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작은 시도와 반복에서 이루어진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75년간의 인간발달 연구에 따르면

“인생의 행복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건 돈도 명예도 아닌, 가까운 관계”였다.

 

그 관계가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내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인간의 정신 건강과 삶의 만족도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이 감각을 잃었다.
무관심이라는 안전지대 속에,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관계를 시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위험한 건,
거절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시도하지 않는 삶이다.

사회적 유대는 감정적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바탕이다.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는 작은 스트레스에도 무너지고,
신체적 면역력까지 낮아진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비로소 온전히 건강해진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누군가의 마실이 되어줄 준비가 되었는가?”
정든 이웃을 떠나보낸 시대,
우리는 스스로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야 할 차례다.

대문이 없어도, 마당이 없어도
우리는 다시 따뜻한 마을을 만들 수 있다.

마을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이다.

 

6월 3일 대한민국이라는 마을에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주며, 세심하게 이웃의 안위를 살펴줄 마을 대표를 뽑는 잔칫날이다. 잔치로 끝날지, 또 재앙으로 치닫게 될지는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그저 자신을 믿고, 그 믿음대로 나아가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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