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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돈까스, 남산공원 그리고 남산신궁(조선신궁)

by 꼰대가랬숑 202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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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돈까스, 남산공원 그리고 남산신궁(조선신궁)

 

2024년 한국을 찾는 관광객의 수가 1200만 명이 훌쩍 넘어섰다고 한다. 남산타워, 남산 케이블카, 남산 돈까스는 남산을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이제는 국내는 물론 해외 관광객들도 알고 방문할 정도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런 남산은 또 다른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서울의 상징: 남산


남산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오래전에는 데이트코스로도 많이 애용되었다. 남산 타워 회전 레스토랑은 데이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방문 코스였고, 대략 50분 정도에 한 바퀴 360도 회전하며 바뀌는 서울 야경을 즐기며 식사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꽤 괜찮은 데이트 장소였다. 

지금은 롯데타워 전망대가 있어 전망대라는 명칭이 무색하긴 하지만 그 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장소임에는 틀림 없다.

식사 후엔 내려와 야경을 뒤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곤 했고, 그 사랑의 증표로 난간에 잠긴 자물쇠의 열쇠는 그 수가 너무 많아 산림을 훼손하는 주범으로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남산을 찾는 데이트 여정은 그렇게 마무리되곤 했다. 남산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고 10분쯤 걸어 올라가다 다리 경련이 올 때쯤 바보 같은 결정에 후회하기도 하고, 근처 돈까스 가게들의 호객행위에 말려들어 내가 먹는 곳이 원조일 거라는 믿음으로 넓고 큰 돈까스를 즐겼던 곳. 그 남산에는 아픈 상처가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사는 곳이기도 했고, 이승만 정권 때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여지기도 했으며, 인천 상률 작전 때도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남산 곳곳에는 그때 사용하던 벙커가 여럿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아픈 역사 속에서도 가장 기억되어야 할 수치스럽고 아픈 기억은 따로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우리 땅에 수많은 신사를 세웠다. 그 결과 식민지 조선의 산사는 1945년 일본 패망 직전까지 관폐대사(국가에서 폐백을 올리는 신사) 2개, 국폐소사 8개, 호국신사 2개, 기타 신사 70개 등 전국에 총 1,062를 세웠다.

 

 

 

 

남산공원 그리고 남산신궁(조선신궁)


하얏트 호텔을 지나 독일 문화원을 지나치면 바로 남산도서관이 있고  '남산 공원'의 입구를 알리는 큰 한글 간판이 보인다. 바로 이곳 남산 공원 일대가 일제 강점기에 세운 신사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백범광장으로 명명되어 김구선생의 동상이 있는 곳이다. 2011~12년 '남산 르네상스 회현자락 복원사업'의 결과였다.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각 지역에 관폐대사(국가에서 폐백을 올리는 신사)를 세우고 신사 참배를 강제하였다. 조선의 영구적인 식민지 통치를 염원하며 영구히 이어지길 기원하기 위해 자행되었다.  우민화와 함께 신사참배를 통한 세뇌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 약 80여 개의 신사가 세워졌고, 면단위로는 약 1000여 개, 각 가정에도 작은 신단을 만들도록 강제하였다. 1915년을 계기로 일반 신사에 대한 정비 및 종교에 대한 규칙도 완비하고, 이후 '동화주의' 정책은 1932년 '정신교화'운동의 강화로 '심전개발' 운동으로 구체화하여 진행된다.

일본 총독부의 '동화주의' 정책은 신궁 건립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1920년 조선신사가 들어섰고, 조선신사는 1925년 조선신궁(神宮)으로 승격한다. 면적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백범광장까지 12만 7900여 평에 달했다. 일본은 800만 신이 사는 나라인데, 이 신들은 각지로 나누어 옮길 수 있었고, 남산신궁(조선신궁)은 일본 최고 신사 이세신궁에서 일본의 시조신을 받아 세웠다고 한다. 

일본 왕이 제물을 바치는 관폐대사였으니 일본 전체로 보아도 남산신궁(조선신궁)은 매우 격이 높은 신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본의 남산신궁(조선신궁)을 만들며 남산의 경사면을 따라 이어지던 한양 도성이 크게 훼손된다. 태조가 만든 사당인 '국사당' 등 본래 시설물들 다수가 쫓겨나야 했다. 

 

남산신궁(조선신궁)

 

 

남산신궁(조선신궁) 전경

 

 

 

 

일본이 남기고 간  것들


패망 직후 국내는 너무도 당연히 혼란한 상황였을 것이다. 일본 왕의 항복 직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일본도 마찬가지 상황으로 조선에 살던 일본인 중 상당수가 그대로 조선에 남았다고도 한다. 

본국으로 돌아가던 일본인들의 짐이 너무 많아 바다에 버려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식민지 시절 동안 수탈한 재산을 가려 가려 한 것이다. 전쟁으로 선박의 수가 적었기도 했다지만 '짐이 무거워 비틀 거렸다'는 문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패망 직후까지도 조선제국은 수탈 당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련번호도 없는 돈을 마구 찍어내어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경제는 마비되었다.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정착하는 일본인도 있었고, 적산 기업들은 헐값에 나와 다시 조선인 관리자에게로 넘어갔다. 면사무소 직원은 일본인의 토지 명의를 자신으로 바꿔 부자가 되기도 했다. 

남은 일본인들과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일부가 돌아와 주택난이 심했다고도 한다. 미군정에 의한 폐혜도 심각했다. 조선은 연합국으로부터 승전국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일본은 조선제국에게 개인재산의  반출과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 했다. 

그런 일본이 패망 직후 각 관공서에 걸려 있는 일본왕의 액자와 전국에 있는 모든 신사를 자진 철거 하였다. 

 

패망한 후에도 그 어떤 것보다 '일본 왕'과 '신사'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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