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자라오면서 항상 들었던 말은 거짓말하지 마라, 변명하지 마라, 훔치지 마라였다. 넉넉한 시절이 아니었으니 이런저런 일이 많은 사회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을 가리키려 한 노력의 흔적들이다. 그래서 이때의 세대들에게는 도덕적 잣대와 책임감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
마이너리그 리포트 책임감
메이저 대행사가 아닌 마이너 대행사에서의 출발에는 장.단점이 분명하다. 당연히 업무의 시스템적인 면이 많이 부족하고, 사수의 부재로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대부분의 작은 회사들은 한 명이 여러 가지 역할과 업무를 담당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반면, 대우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제법 창의적이고 빠릿빠릿한 일처리로 나는 얼마지 않아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오픈 멤버들의 텃세 또한 빠르게 정리하였다. 성실함과 실력앞에는 텃세 따위는 문제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들은 배울 것이 없음이다. 뭐든 스스로 찾아내고 이뤄내고 만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그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다. 경험이 쌓이고 신입 직원이 늘어나도 가르치고 키울 시간은 없다. 나도 그도 서로 불만족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남고 그는 떠난다. 이해도 된다. 내가 그랬듯 부족함을 채워줄 뭔가를 찾지 못해서니까. 그렇게 이해하고자 한다.
지금은 법적으로 일하는 시간을 강제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업무처리가 마무리 되어야 정해졌다. 퇴근이든 저녁식사든 야근이든. 그러나 불평할 순 있으나 불만을 가지거나 과한 업무 시간에 대한 대응을 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맡은 일의 경중을 이해하며 일을 했으니까. 내가 맡은 부분의 업무 처리가 지연되면 제작일정이 꼬이고 제작 일정이 꼬이면 발표에 차질을 빚기 때문에 단 1분도 느슨하게 보낼 수 없었다. 밤샘과 야근은 그저 지금 하는 일의 연장 이외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해내어야 하는 상황이니까.
지금 나는 당신은 이런 절체 절명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지 묻고 싶다. 이런걸 아마도 책임감이라고 할 것이지만 이전과 이후의 책임감의 범위와 의미는 많이 다른 게 사실이다.
용 꼬리 VS 뱀 머리
용의 꼬리냐, 뱀의 머리냐의 차이를 두고 선택하라면 나는 용의 꼬리를 선택하겠다. 용이 서식하는 곳의 환경과 시스템이 미래를 위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회사의 매출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오너들은 다들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해서 메이저 출신 임원들을 그때부터 회사에 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스템에 익숙지 않은 기존 직원들은 그 변화와 항상 충돌한다. 결국, 일의 주체인 직원들과의 문제로 임원들은 몇 달 못 견디고 나가게 된다. 수없이 시도하지만 그때마다 100% 실패한다.
뱀 머리로 작은 곳에서 왕노릇 하다 보면 감각도 무뎌지고 나태해지기 쉽다. 왜? 어떤 짓을 해도 웬만해선 잘리지 않으니까. 나 또한 그랬다. 입사 2년 차에 이미 사장 이외에는 내 입지를 흔들 직원들은 없었다. 경력이 아무리 많은 CD, 메이저 대행사 출신 부사장, 이사, 상무들이 왔어도 나는 그들과 다른 위치에 있었다. 물론, 그 위치가 가능했던 이유는 첫 번째, 내 모든 시간을 모조리 회사일에 희생했고, 두 번째 비교적 연봉도 높지 않았고, 세 번째 일처리도 제법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성비의 차이랄까.
메이저 출신 CD의 경우를 보자 작은 회사에서 선택할 정도면 이미 현업에서 은퇴할 시기쯤 일 테고, 메이저에서 다져진 고집과 아집에, 고연봉에, 캠페인 위주 업무 진행을 했을 테니 작은 회사 시스템은 하나도 모를 것이다. 결과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다만, 나 또한 한계가 명확했다. 더딘 성장성이 그것이었고, 점점 익숙해져 나태해지는 것이 그것이다.
조금씩 더 나은 환경으로 점프해야 할 때 이런 상황이 그 선택을 한 해, 한 해 미루게 만든다. 익숙해지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첫 회사의 3년
적어도 나는 메이저 광고대행로의 점프를 늘 염두에 두곤 있었다. 다만, 현재의 익숙함과 건설광고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반 브랜드를 취급하는 대행사로의 이적은 그리 쉬운 편이 아니었다. 3년 정도 시점이 되었을 때 이적할 수 있었고, 일반 브랜드 광고주를 케어하는 대행사이긴 했으나 방송광고를 많이 진행하는 회사는 아니었고, 라디오나 신문광고, 인쇄 제작물 디자인, 프로모션 위주의 회사였다. 그 시점 내가 인맥 없이 스스로 이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였다. 삼성전자의 몇 개 사업부를 대상으로 이벤트 프로모션과, 디자인이 주였고, 몇 개의 지방 대학의 연간 광고대행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름 건설 한 분야에서 전자, 교육, 아웃도어, 브랜드로의 확장이었다.
첫 회사에서 채운 3년이라는 시간은 어떻든 간에 나에게는 매우 큰 자산이 되었고, 일처리 속도, 광고주 관리, 매체 운영 등등에서 3년 차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이적 한 곳에서도 꽤 높은 연봉으로 수월하게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다양한 브랜드를 경험하게 되면서 또한 다양한 분양의 광고 담당자들과 만나게 되었고, 인적 네트워크 확장의 좋은 계기가 되었다. 요즘은 보통 신입 사원을 뽑고 1년이면 그만두기 일쑤이다. 자기 경력 관리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층의 인력난도 있고, 더 이상 힘든 직업 속에서 자신을 매몰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상 때문이기도 하다.
기업에서는 이런 부분을 어떻게 타개하고 극복할지 연구가 필요하다. 요즘애들은... 하며 넘기기엔 인력이 태부족하니까.
그런데 말이다.
메이저에서 시작하게 된다면 또 상황은 많이 달라지게 된다. 점프하기 위해 보내야 하는 3년이라는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물론, 밑단에서만 할 수 있는 기초적인 업무 능력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처음부터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인큐베이팅된 사람과 스스로 성장한 사람과의 차이는 분명 있다.